지난 수요일 성당에서 신앙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후 질문이 있느냐 물으시는 신부님께 청년부 친구가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요는 아내는 신앙의 중심을 잡고싶어 성당에서 하는 강의나 활동을 열심히 하려하는데 남편은 너무 지나치게 성당에 매인다 생각하여 부부간에 충돌이 있으면 아내는 신앙의 중심을 잡는것이 중요하니 자신이 하려는대로 성당으로 향하는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남편과의 충돌을 완만히 정리하는것이 먼저인지였습니다. 묵직한 질문에서 이 친구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것은 저또한 그런 물음을 오래전에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듣고 묵상을 하면서 신앙에 대해 알아야 할것도 궁금한 것도 많아졌습니다. 성당에서 봉사직 또한 맡고있던 터라 성당을 가는 횟수는 당연 잦아졌지요. 위의 두놈은 대학생에 고학년이였지만 아이들 라이드와 스케줄이 강의 시간과 겹쳐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왜이렇게 신앙을 알고자하는 나를 방해하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트럭을 운전하느라 오래간만에 집에 온 남편을 뒤로하고 성당으로 향한적도 있었습니다. 저를 향한 가족들의 불평이 신앙의 중심을 잡고자하는 나를 훼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묵상에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주님말씀대로 살고있지 않다는 것을요. 신앙의 중심을 잡겠다면서 껍데기만 쥐고 있었다는것을요.
복음과 사제는 한가지만을 얘기합니다. “사랑하여라.” 너무 심플합니다. 사랑하며 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많은 순간 사랑에 너무 관대하기도 하고 사랑에 인색하기도 하고 또 사랑에 무관심하다는 겁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을 놓치기도 하고 누가 사랑이 필요한지를 몰라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을 가만히 쥐고 있기만 하기도 하고 언제 이 사랑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를 몰라 동동거리기도 합니다. 심플해 보이는 사랑하기가 점점 복잡해지는것 같지요^^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간과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사랑의 표현은 때로는 공감과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상대의 뼈를 때리는 충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복음과 신부님 강의 속에는 무수한 사랑 실천의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과거의 사랑을 몰랐던, 사랑을 하지않았던 나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국 깨닫게 되지요. 우리가 나자신을 위주로 세상을 보고있다는 것을요.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어 호산나를 외치며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라 환영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칩니다. 이런 저희에게 예수께서는 “사랑"인 당신의 말씀을 증명하시려 당신을 버리십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야 사랑을 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될때면 내게 묻습니다. “사랑했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그거 사랑 맞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냐?”
신앙의 중심은 내 중심이 아닌 마음으로 사랑을 하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상황에 내가 있으면 되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주일이 벌써 사순5주간 입니다. 예수님과 공생활을 함께 했던 신실했던 제자들마저 배신과 배반, 도망칠것을 아셨음에도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고통을 뒤로하시고 유혹의 체질에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제자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피흘리는 죽음의 고통을 감내하시고 부활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께 “원수까지 사랑하는 용기"로 응답해야겠습니다.
지난 수요일 강의중 묵상과 깨달음이 생각과 글에만 머무르면 안되며 반드시 세부적인 실천사항으로 이어져 귀한 알아차림을 쉬이 잊혀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순과 부활을 맞이하여 마음속 울림을 실천으로 옮기는 지혜를 갖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