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는 외부적인 것이나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역모임에 참석률이 적은것에 대해 신경쓰고 속상해 하기보다 참석한 교우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들었거나 내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봤을때 그사람을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자아성찰을 하며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결국 나를 돌아보게 되면 반성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에 대해 미운 감정이 덜 생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 보통 마음이 산란한 일이 별로 없는데 친정엄마가 암수술을 받게 되면서 좀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더욱 나쁜 상황을 상상하며 지금의 상태를 상대화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도움이 된다. 주님의 평화는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왜 하늘나라에 가까운지를 깨닫게 된다. 우선 아이들은 화가 나도 금방 풀리고 꽁하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어른은 참 복잡하고 마음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된다.
- 주님의 평화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평화가 뭔지 알기를 원한다. 직장에서 돌발 상황이 생겼을때 최악의 상황을 항상 생각해두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보니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것이 적용되는 것 같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해두니 문제가 생겼을때 해결하는데 좀 더 수월한 것 같다.
- 아이를 키우며 엄마와 아빠의 기본 입장이 다름을 느낀다. 아빠는 아이가 넘어져도 괜찮다는 입장에서 어떻게 일어나야 되는지를 가르친다면 엄마는 아이가 넘어지는 상황이 아예 없기를 바라기에 아이가 넘어지면 신경을 쓰고 마음 아파한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항상 마음 졸이며 살았기 때문에 마음이 평화로웠던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아이가 많이 커서 좀 덜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잘 모르니까 아직도 힘들고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가 뭔지 느껴보고 찾으려고 요즘 남편과 아이와 함께 미사에 자주 나온다. 내가 성당에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생기니까 아이한테서 좀 떨어지고 마음도 덜 불안해지는 것 같다. 주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다른 교우는 남편과 같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상의해서 같은 관점에서 아이를 양육했기 때문에 특별하게 아이들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지 않은지 위의 아이 엄마에게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위의 아이 엄마는 사람마다 다 자라온 환경이나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엄마들하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위안을 받거나 하지 못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엄마는 별로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성도 잘 못 느끼겠다.
- 전에는 한국에서 집안의 문제가 안 풀리거나 마음이 엄청 산란할때 묵주기도와 매일미사에 다녔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성경말씀이 생각나기도 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도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때 침묵속에서 그사람에 대해 마음을 삭히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 마음이 산란해지면 묵주기도를 한다.
- 어떤 형제님이 한국에 있을때 영세를 받고 난 후 항상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요즘 사람들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이기에 나도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좀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교우들도 있지만 평화의 인사를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는지는 받는 사람들의 몫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하려고 한다. 평화를 안 받아드린다고 해도 나에게 그 평화가 되돌아올테니 나쁜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 처음에는 그 평화의 인사가 어색했는데 자꾸 듣다보니 고맙고 좋다. 그래서 나도 위의 자매님을 따라 평화의 인사를 하려고 한다. 물론 어느 가정을 방문하면 항상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한다. 천주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 세상의 평화와 주님의 평화를 비교해보면 세상의 평화는 내가 뭔가를 얻고 소유해야 채워지는 것 같다. 반면 주님의 평화는 내가 빈 상태일때 얻게 되는 것 같다. 세상의 평화가 좋아보이고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주님의 평화는 고통이 수반된다.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용서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데 나를 버리고 나면 힘든 감정이 없어지면서 용서도 되고 평화가 오는 것 같다. 그게 진정한 평화이다.
- 누구를 미워하는 감정은 부정적이다. 용서가 안된다면 잊어야 하는데 잊는 것보다 용서가 빠르다고 한다. 용서도 하지 못하겠고 잊지도 못하겠을때는 용서가 빠르고 용서가 나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이 있을 경우 나도 다른 사람에게 결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부정적으로 안가게 된다.
- 절친은 싸움을 통해서 그걸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상처를 극복할 수 있으려면 서로 주고 받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민 생활을 하면서 그게 녹록하지 않다. 일단 그렇게 시간을 투자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또 이민사회가 작다 보니 말이 많이 돌기 때문에 불편한 일이 있었을때 그걸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피하고 본다. 그러다보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채 남아있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있는데 문득 내가 그 교우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나를 내려놓게 되고 그 교우를 위해 기도한다. 나를 불편해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그 교우도 마음을 편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는 주님께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