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성체성가: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
나는 나만 생각 했었는데. 나를 위해 주님 불렀는데. 매자리 선명하신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나의 이름 잊지 않으셨네. 가슴 메어질듯 그 음성 나를 부르시네.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부족해도 가난해도 아파신음 할때도. 사랑한다 내가. 너를 원한다. 나는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이다.
1주차
예수님께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라고 하신 복음구절을 읽었습니다. ‘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한 죄는 도둑질, 거짓말, 배신,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이 사회에서 소위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요?'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죄라는 것이 나 스스로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투, 분노, 억울함’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그리고 그 감정으로 인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단 하나의 일 ‘이웃사랑’을 못하게 하는 것 모두.라고 생각하자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단지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아닌 한없이 작은 죄인인 저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나.. 하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더 편안해 졌습니다. 그들이 나의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심어준 것이 내가 다른 이들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준 것처럼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과, 또 나도 그들과 다를바 없는 죄인으로서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나만 억울할게 아니다.’ 라는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죄’를 바라보는 시각마저 한없이 사회적이고,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은 돌아보지 않고 죄는 다른 이들이 나에게만 짓는다는 나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나를 보며 ‘부족함을 넘어 나쁜 나’까지 품어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저희를 위해 기도하신 주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어떠한 상태에 있어도 그분만은 나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그 확신이 이기적인 죄인인 저를 돌아보고 당신 곁으로 가도록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구원자, 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사랑으로 치유되고 구원받길 기도합니다.
2주차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이라는 찬양을 들으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사에서 “나는 나만 생각했었는데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내 이름 잊지 않으셨네” 저는 부족하고, 때로는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저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찬양을 통해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내가 부족하고 가난해도 아파 신음할 때도 사랑한다”라는 가사처럼, 저는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저는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시고, 나를 사용하시려는 그 마음에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구원의 삶을 따라가며 이제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보잘것없는 나도 써주시는구나 이러한 나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수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주신 주님이 저를 쓰시려는 계획에 깊이 감사하며, 작은 일이라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희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크신 사랑 덕분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로써 충실히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제 삶을 변화시킨 것처럼, 그 사랑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길 기도합니다.
3주차
성가를 묵상하며 제가 힘들때만 주님을 찾았던 건 아닐까 돌아보았습니다. 힘들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힘들때만 찾는다면 그것이 사랑의 관계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기 보다는 주님을 저의 원함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정도로만 생각한 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원함이 해결되지 않으면 혼자 토라지곤 합니다. 그런 저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평소엔 불러도 대답도 없다가 제가 힘들때만 문제를 해결해 달라 찾고, 감사하지 못하고, 화만 낸다면 주님께는 제 상황이나 문제 보다는 사랑이 없는 제 마음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크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 마음은 왜 그런걸까요? 묵상을 하면서 제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적다는 것을, 혹은 없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제삶에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타나야 할 모습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은 의지가 부족했고, 알더라도 그대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은 큰 업적을 세우는 것이 아니였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하셨듯 저도 주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주님이 주님을 내려놓으셨듯, 저도 저를 내려놓는 것. 주님 마음을 통해 세상을 볼 때 제가 아픈만큼 다른이도 아픔을 보게하시고 주님이 얼마나 그사람을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요즘은 힘들때 만이 아니라 평소 제 삶에서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떤 말을 해주셨을까 생각해 보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복음을 보고 배워야 겠지요. 느리더라도 주님 말씀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로지 저의 아픔만 바라보고, 위로해달라, 이해해달라 애원하고 호소했던 저의 부끄러운 모습들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느리더라도 실수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원하고 주님 마음을 배우는 저희 모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주차
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포기가 빨랐습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려니 생각하고 무관심을 주었고, 한 사람이 떠나면 다른 사람과 놀면서 떠난 사람에 대한 미련이 없었습니다. 친구가 많다는 교만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을 잘 몰랐습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상처를 덜 받기 위한 회피 방법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제 모습을 돌아보면 교만하고 이기적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이 성가의 가사처럼, 제가 힘들고 외로울 때 제 상처를 낫게 한 것은 제 주변 친구들과 가족들의 노력과 사랑이었는데, 저는 그걸 악용한 것 같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서로 다툼이 있을 때는 서로 맞춰주기 위해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건데, 저는 그 사람들의 용기를 무시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바로 회피하며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기했습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제가 아무리 나쁜 길로 가고, 주님을 미워하던 상황에서도 바른 길로 잡아주시고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는데, 저는 제가 편하다는 핑계 하나로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을 반성하며, 저도 주님과 이웃들의 사랑을 받기만 했었기에, 이제는 남들에게 더 따뜻한 사랑을 주고 슬픔을 보듬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관계를 끊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고, 제 자신을 내려놓고 남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려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마음을 알기에, 제 자신과 주님의 자녀들 사이에 벽을 쌓기보다, 친구, 가족, 또는 이웃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성가를 들으면서, 모든 관계에는 포기보다는 노력과 이해, 그리고 용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5주차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저의 기준의 예수님의 사랑은, 깨닮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완벽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힌트만 주시고 저희가 답을 찾아내게 하시지요. 저는 제자신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무슨 나쁜일이 있으면 남이나 예수님 하느님을 원망하고, 저의 잘못은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캐나다라는 낯선 나라에 처음 왔을때 친구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저랑 사귀어 주지 않는 내 또래 아이들과, 이런 시련을 주신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제가 이해받기 원했고, 위로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저는 깨닮았습니다. 이런 시련을 주시는것도 저를 위한 한단계더 레벨업 시켜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인것을요. 그 뒤로 저는 캐나다에 새로온 친구들에게 항상 먼저 말을걸고 친해졌습니다. 저도 그 친구들의 힘듦을 알기때문이죠. 예수님은 제가 힘들때 항상 옆에서 응원해주셨을겁니다. 어서 내가 준 힌트를 깨닮으라고. 그러나 아무리 그런 깨닮음을 주셔도 저는 항상 부족했습니다. 힘들때만 예수님을 찾고. 남이 아닌 저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들어주시지 않으시면 원망만 했죠. 그러나 구원자 예수님은 그런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옥불로 떨어질락 말락하던 저를 잡아주셨습니다. 바로 신부님을 통한 여러 깨닮음과 회계를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깨닮았습니다. 준만큼 받는다는 말이 있죠. 그대가 남을위해 자신을 버리고 기도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그대를 위해 항상 기도할것을요. 시련은 결국 예수님이 주시는 힌트 입니다. 우리를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저희가 더 커지기를 바라실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련이라는것을 주어, 깨닮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힘들고 안좋은일이 있어도, 원망하거나 자신이 이해받기 원하지 말고, 예수님이 주신 이 시련의 이유를 생각하며 사람들과 많이 얘기하면서 깨닮음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