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은,
사랑으로 실천 하는데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켜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안으시고 십자가처형을 희생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신앙인으로써 산다는 것은 세상적인 사과는 반대 되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모르고 살아 왔고 여전히 배우고 있는 중 입니다 . 그리스도의 삶의 실천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하며 남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나를 드러내고, 내것만 챙기는 마음을 없애고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분쟁이나 마찰이 있을때는 먼저 원인을 파악하고 상대방이 화를 내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것들이 익숙하지 않다면 스스로를 깍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공동체 모임에 참석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관계속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아갈수없고,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살기 위해서는 매일 나를 돌아보고,희생을 하는것을 생활하여야 할 것입니다.
_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 2장 26절)
이번 주제 성구는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라! 삶 안에서 신앙을 살고 무엇이든 해보라는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 현실에 부딪혀 실천 많이 사라져버린 나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뭔가 해야지.. 뭐 부터 해야 하지?
하루 2-3분 이면 충분한 매일 미사 읽고 묵상해보기, 신앙 콘텐츠 듣기 등등 할 수 있는걸 찾는건 그리 어렵지 않으나 그걸 직접적으로 행하는데는 근데.. 라는 단어가 뒤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내가 삶안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들을 조금은 내려놓고 내어 맡기고 내 영혼을, 내 안의 예수님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한거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소금기둥이 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깨어 노력하는 그 모습 자체가 필요한거 같습니다.
_ ''영이 없는 몸이 죽은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성경에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우리들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와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하느님께서는 원하시는데..
나는 이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어떤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몇년전에 하느님께서 나의 삶에 오셔서 도와주고 계신다는 체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느낌은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으며 매일 기쁘게 생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저도 잊어버리고 생각과 말로써 죄를 짖곤하지만 그래도 짧은시간안에 얼른 알아차리곤 먼저 사과도하고 고치려 노력하고있습니다.
지금 제가 실천하고 있는 것은 직장안에서 피곤해보이는 동료들을 보면 사탕을 나누어주기도하고 도움을주는 동료에게는 자그마한 선물도하며 칭찬하는 말도 전하곤합니다 그래서인가 일하는곳이 천국이라는 느낌을 자주 느끼곤합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이쁜말 하려고 노력하고있고 정말 자그마한 일부터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저와 일로써 만나는 외국친구들과는 10년 가까이 계속해서 일이 연결되고 또 지인들을 소개를시켜주고 해서 매일매일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또한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지혜와 은혜라 생각하며 생각과 말만으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 묵묵히 행함으로 믿음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_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며 살기를 원한다. 매주 성당에 가고 나의 죄를 뉘우치며 또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는것을 바라며 열심히 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당안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일단 미사가 끝나고 성당밖을 나가는 동시에 세상사람들과 같은 맘으로 살게된다. 주님을 믿는다면 다른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면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나는 차를 타고 운전대를 잡는 동시에 다른사람이 혹시라도 내앞에 예의없이 끼여들면 화를내고 안좋은 말을 한다. 아차 하는 맘으로 반성을 하여도 그때뿐 나의 턱없이 부족한 믿음이 양보는 못할 지언정 조금이라도 나를 무시한다 생각하면 가차없이 또다른 내가 튀어나와 안좋은 행동을 한다. 말로는 잘난척 똑똑한척 나름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상황에 접하면 안타까운 행동에 후회를 한다.
나의 바램은 내가 신실한 믿음이 자라나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않고 나또한 나의 믿음으로 나의 가족들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사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_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주셨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본인이 가르쳐준대로 살지 않는다면, 파멸 밖에 없다는 것을요. 그러니 두려움 때문에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오히려 행복할 수 있고, 모든 족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복음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우리들이 한 일이 대단했기에 그 대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즉, 진정으로 믿는다면 복음대로 살 수 밖에 없을테인데, 실천이 없다는 것은 애초에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믿음에도 크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질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죽은 믿음과 같다는 말씀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사실, 믿음이 실천으로 드러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은 살아있을 때도 있지만, 죽어있을 때도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컨디션이 좋거나 기분이 좋을 때는 남들에게 잘해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남들에게 함부로 하는 것 뿐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믿음의 크기가 크다면 내게 안좋은 일이 있더라도 남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런 "안좋은 일"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다하셨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다거나, 내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처한 안좋은 상황이나 상대방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의 크기를 더 높여야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하느님을 알아가게 된 이 시점에, 지금 당장 사도 바오로와 같은 크기의 믿음을 갖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속담에도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하면 나의 믿음을 더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고, 여러가지 장치를 많이 많들어놓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십분 이용하여 내 믿음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_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과 같다." 참으로 수없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나를 돌아보게하는 말씀이다. 나 자신을 정화시키는건 그래도 쉬운일인것같다. 복음을 읽고 묵상을하고 내 안에 채워지는 이기심을 버리려 스스로를 다그치고 부족하나마 하루하루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이젠 연륜이 있어서인지 세상에 이해못할일이 없다는것도 알아간다. 나를 비울수록 더 평안해지고 작은 기쁨도 두세배의 기쁨으로 느껴지기에 항상 감사하고있다 근데 과연 내가 이웃을위해 사랑을실천하고있나? 노력하고있나?별스런 실천이없다. 삶에 치인다는 생각이든다.쳇바퀴도는한정된 삶속에서 그저 자신만을 훈련하고 주위지인들과의 교류를 원만히할뿐.. 과연 내가 나서서 사랑을 실천하려하고있는가... 또한번 반성하게한다.나의 믿음은 죽은믿음이란말인가.. 한국에서도 또 여기서도 역시 우물안에만 살고있는 내가있음을.. 내안의 평화는 우물속에서의 평화임을느낀다. 더 깊히 생각하고 묵상을 더 해봐야겠다. 나는 어디로 가고있는가?...